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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 ⑥(최종회)
     ⑤편에서 이어집니다. 김녕에서 가까운 세화리와 하도리를 지났다. 이곳은 1930년대 잠녀(潛女)들의 투쟁을 그린 『껍질과 속살』, 『바람타는 섬』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해녀조합 간부들인 일본인들이 가혹하게 잠녀들을 수탈 했고, 이에 대한 저항을 다룬 소설들이다.  해녀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잠녀는 제주도 바닷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나는 세화리와 하도리를 뒤로 하고 차를 몰아 성산 일출봉 터진목에서 그들을 만났다. 까만 잠수복을 한 그들은 사진을 찍는 나를 웃으며 쳐다보았다. 예전에는 박으로 정성들여 만든 테왁을 썼는데 지금은 스티로폼으로 만든 것을 쓰고 있다. 조금 거리를 두고 해녀들이 물에 들었다.  1936년 21세 때부터 제주도를 연구한 문화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이치(泉端一)의 『제주도』에는 “바가 지에 끈이 달린 테왁과 조개 딸 때 쓰는 갈퀴를 들고 물안경 쓰고 자맥질을 한다.…… 똑바로 선 자세로 물속에 얼굴을 박고, 목표물을 가늠한 다음 발을 힘 있게 굽혀 가슴께로 끌어당기고 머리를 잽싸게 물속에 디밀어, 몸을 뻗고 발을 공중에 흔들어 침하속도를 높인 다음, 신체가 완전히 물속에 잠기면 발을 차듯이 움직이고, 손으로 물을 양옆으로 가르면서 가라앉는다. 한 번의 잠수를 끝낼 때는, 몸을 꺾은 자세로 다리를 아래로 내려서 힘차게 바닥을 차고 솟구친다. 수면에 뜨는 것과 동시에 ‘휘유’ 휘파 람을 부는 것이다.”라고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그 휘파람을 제주에서는 ‘숨비소리(숨비 질소리)’라고 한다. 이 소리를 내고는 물질하는 친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해녀들은 1900년대 초부터 섬 밖으로 벌이를 나갔다고 한다. 일본, 육지 연안, 강원도, 심지어는 청진 까지 갔다가 기선을 타고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국 청도(靑島)까지도 갔다고 한다.   현기영의 거룩한 생애를 학창시절에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소설은 해녀 ‘간난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참으로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그녀는 일제시대 때 잠녀의 딸로 태어나 17살에 상꾼 잠녀가 되어 빼앗긴 밭을 되찾는다. 놀음에 미친 시아버지 때문에 무너진 집안을 그녀는 잠녀 일을 하여 일으 키고, 어린 신랑을 읍내 공립학교까지 보낸다. 그리고 일제 말엽에는 징용에 끌려가게 된 남편을 이끌고 육지로 물질 나가 금강산 근처에서 8.15 광복을 맞는다. 마침내 미군과 소련군이 지키는 38선을 넘어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4.3항쟁 시기에 한 많은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눈시울이 붉어 졌다. 강인한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너무도 서러웠기 때문이다.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 뒤로는 일출봉이 장엄하게 서 있었고, 파도는 거칠었다. 이곳은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와 신경숙의 소설 깊은 숨을 쉴 때마다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현송 강호(제주 효명사 주지)  표선민속촌과 성읍 민속마을에 들러 제주 도세기(돼지)도 보고, 올레며 정낭도 보며 옛 기억을 더듬었 다. 내 유년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갈옷을 파는 가게 앞에서도 한참을 서성거렸다. 푸른 감으로 물을 들이는 갈옷은 여름철 뙤약볕에서 김을 맬 때면 이만한 옷이 없었다. 땀도잘 흡수하고 바람도 잘 통하기 때문이다. 차를 달려 서귀포에서 이중섭이 거닐던 천지연폭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바로 추사 적거지로 향했다.  추사는 대정 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는 처음 화북진에 도착한 후 걸음을 옮겨 대정현의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섬 안의 섬이라 할 추사의 적거지는 가로 놓인 정낭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9년 간의 유배 생활은 추사로 하여금 한치의 틈도 없는 고독과 자연에의 몰입, 예술혼을 불태우게 했다. 그는 이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사랑하는 아내의 부고를 들었다. 그리고 수선화를 사랑했다고 한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 시름 가시고/ 너와의 선연(仙緣)은 다할 수 없어/ 호미 끝에 버려진 예사론 너를/ 오롯한 창가에 놓고 기른다.” 나는 어디 수선화를 심어놓지나 않았는지 주변을 서성거렸다.   제주는 신화의 섬이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섬이다.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 너머에 숨쉬고 있는 제주의 문화와 역사를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대별왕과 소별왕, 설문대할망을 이야기하고, 삼별초의 항쟁과 4.3항쟁, 해녀들과 유배자들의 쓰린 상처를 보듬어 안아줄 수있기를 소망한다.   * 참고문헌  고시홍,「제주섬의 소설적 변용」, 『바다와 섬의 문학과 인간』, 제주국제협의회 편, 1999.김영돈, 『제주민의 삶과 문화』, 제주문화, 1993.김헌선, 『한국의 창세신화』, 길벗, 1994.박종성, 「<천지왕본풀이>의 신화적 의미」, 『구비문학연구』6집, 한국구비문학회, 1998.시바 료타로, 『탐라 기행』, 학고재, 1998.오대혁, 「김통정 관련 서사물에 투영된 역사인식」, 『설화와 역사』, 집문당, 2000.이영권, 『제주역사기행』, 한겨레신문사, 2004.장주근, 『풀어쓴 한국의 신화』, 집문당, 1998.진성기, 『남국의 민담』, 형설출판사, 1976.진성기, 『제주도 무가 본풀이 사전』, 민속원, 1991.현용준, 『제주도 전설』, 서문문고, 1976.현용준 현승환 역주, 『제주도 무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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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혁(시인, 문학박사)
    2019-08-01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 ⑤
    용두암 ⓒ비짓제주   나는 서둘러 용두암과 용연을 둘러보았다. 저녁 무렵에는 반짝이는 놀이시설과 호텔 그리고 높다랗게 쌓아올린 탑동매립지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둠에도 잠들지 못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밤이 되어도/잠들지 못하는 제주바다야,/ 숱한 배반으로/ 쫓기고 떠밀려 온 세월을/ 이 밤도 울부짖는 바다야”(양중해 - 잠들지 못하는 바다)  제주의 어른들은 무슨 일이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뺄라진추륵 허지 말라(잘난 척 하지 마라).” “곤 밥(흰 밥) 먹은 소리 허지 말라.”라는 말을 흔히 했다. 왜 그랬을까? 제주 민중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소리 한번 쳐서 죽고, 나서서 죽고, 혼자 뛰어가다 죽고, 사람들에게 싸우자 하다 죽는 이들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제주민들의 외지인들에 대한 경계의 눈길도 어쩌면 죽음의 역사를 통해 내면화된 집단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아침 일찍 애월읍 항파두리를 찾았다. 삼별초가 여.몽연합군과 맞서 싸우던 곳이다. 강화도, 진도를 거쳐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온 김통정은 귀일촌에 토성과 석축으로 내외성을 쌓고, 애월포에 목성을, 하귀포에 군항(軍港)을 세웠다. 성의 규모는 외성인 토성의 둘레가 6Km 가량 되었고, 성 안에 백성들을 살게 했다. 여.몽연합군의 맹렬한 화공(火工)을 맞아 항전하다 함덕포가 무너지고, 항파두리성이 함락되자 김통정은 남은 병력만을 이끌고 한라산에서 싸우다 자결하고 만다.  김통정의 죽음은 고려에서 항몽세력의 뿌리가 완전히 뽑힌 것을 뜻한다. 고려 정부의 수탈과 지방관의 가렴주구에 시달려왔던 제주 민중은 김통정 세력에 협조하면서 반정부, 반외세의 기치를 함께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패배한 영웅으로 만들었고, 몽고의 마목장이 들어서며 제주 민중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김통정은 애월면 고내리의 고내본향당본풀이를 비롯한 6편의 무가 속에서 탐라의 생산물에 욕심을 부리다 세 장수에게 죽은 것으로 그려졌다. 항파두리 토성 일대에는 살맞은돌, 돌쩌귀, 장수물 등의 전설로 당시의 역사가 남아 있다.  다시 차를 돌려 북제주군 구좌읍 쪽으로 향했다. 김녕사굴과 만장굴을 찾았다. 제주에는 이외에도 협재굴, 쌍용굴, 소천굴, 황금굴, 빌레못굴 등 세계적인 용암동굴이 많이 있다. 만장굴은 13Km나 되고 석주, 종유석 등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고고학상 가치가 높은 굴이다. 만장굴 ⓒ비짓제주   김녕사굴은 S자형의 동굴로 세 개 부분으로 나뉘는데 뱀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에 이 굴 속에 살던 커다란 뱀은 매년 큰굿을 하고 처녀를 희생으로 바치지 않으면 곡식밭을 휘저어 흉년이 들게 했다.   이 즈음 서연(徐憐)이라는 판관(判官)이 부임하여 군졸과 함께 그 뱀을 창검으로 찔러 죽였다. 서판관은 배를 타고 제주를 떠나다 뱀신의 복수로 파선당하여 고기밥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뱀이 나왔겠는가? 조선시대 관리들이 유교 이념을 앞세워 제주의 신당을 파괴하려는 데 대한 민중의 저항 의식이 설화화된 것이리라.  이곳 김녕굴당에는 뱀신인 궤네깃또 신이 모셔진다. 바다를 건너 들어온 백주또 할망이 사냥을 하며 살아가던 토착신인 소천국과 만나 일곱 자식을 낳아 길렀다. 사냥을 해서는 먹고 살 길이 없어 농사를 짓는데, 소천국은 밭 갈던 소까지 잡아먹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여덟째 자식을 낳아 기르던 백주또는 오백 장군의 딸을 첩으로 두고 살던 소천국을 찾아갔다.   그런데 소천국은 고기를 굽고 있었고, 그 모습에 화가 난 백주또는 아들 궤네깃또를 무쇠상자에 넣고 동해 바다로 띄워버린다. 궤네깃또는 용왕국의 막내딸과 결혼하고, 강남천자국에서 공을 세운 후 제주섬으로 들어온다. 그 모습에 무서워 도망가던 백주또와 소천국은 죽게 되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당신이 된다. 형들도 모두 죽는다. 궤네깃또는 궤네기에 좌정해 사람들이 일년에 한 번씩 통째로 돼지를 바치면 마을을 튼튼히 지켜주는 신이 되었다. 뱀신에게 돼지를 바치는 본풀이의 내용이 앞서 본 설화를 낳게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뱀신을 모시는 곳으로는 송당본향당, 대정광정당, 내도본향당, 표선 토산당, 차귀당 등이 있다. 그리고 일반신 본풀이인 칠성본풀이는 집안의 풍요를 가져오는 뱀신인 칠성을 노래한다. 지금은 많이 흐려졌지만 이렇듯 뱀 신앙은 제주도민의 생활 속에 깊숙이 살아 있었다. 제주도처럼 뱀 자체를 신앙화하면서 체계화한 곳은 찾기 힘들다고 한다. 현길언의 「김녕사굴 본풀이」는 김녕사굴에 얽힌 위 설화와 칠성 본풀이를 혼합하여 흥미롭게 쓴 소설이다. ⑥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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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혁(시인, 문학박사)
    2019-07-27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 ➃
    삼성혈은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세 시조가 태어난 곳이다. ⓒ비짓제주   제주시에서는 삼성혈을 맨 먼저 찾았다. 탐라국은 신라와 백제에 입조하여 국호와 벼슬을 받고 고려 태조 21년(938)에 고려에 속하게 되었는데 삼성혈은 그러한 역사 시대에 편입해 들어간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세 시조가 태어난 곳이다.   거목들이 들어찬 뜰을 걸어 들어가면 3개의 구덩이가 나온다. 이 구덩이에서 사람이 솟아나왔다는 것은 물론 허구이다. 아마도 탐라 건국신화이자 3성 시조의 신화를 노래하던 당굿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종 21년(1526)에 이수동 목사가 석단을 쌓고 혈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 유교식 조상 제의로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매년 유교식으로 대제(大祭)가 봉헌 된다. 『성주고씨전』(1416)과 『고려사』(1454)에는 삼성혈신화가 전해진다.  한라산 북쪽 기슭의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인은 탄생했다. 그들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 떠내려 왔다. 그 함을 열었더니 돌함과 붉은 띠를 두르고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가 있었다. 돌함에는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씨가 있었다. 사자는 벽랑국(碧浪國)에서 신의 아들 3인에게 배필이 필요할 듯하여 세 공주를 모시고 왔노라 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활로 거처할 땅을 점쳤다.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소와 말을 길러 살림이 풍부해졌다.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는 세 공주를 맞이한 연혼포(延婚浦. 속칭 황루알)와 결혼식을 올린 혼인지(婚姻池)가 있다.  삼성혈 가까이에 있는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중앙로로 걸어 내려갔다. 세종 30년(1448)에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세워진 관덕정을 찾아가니 제주목 관아가 그 옆에 복원되고 있었다. 탐라국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정치와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곳을 1991년부터 발굴하여 옛 모습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덕정 광장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하니 관아 복원만으로 채울 수 없는 곳임을 생각하게 했다.   사진출처_비짓제주   관덕정 광장은 천주교도들의 횡포와 봉세관의 조세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이재수의 난’의 무대였 다. 수백 명의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는 구한말에 일어난 방성칠 난과 함께 이재수의 난을 그렸다. 관권의 핍박과 외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대한 제주민의 항쟁을 다루었다.  또한 관덕정 광장은 일제 말엽에는 5일장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 4.3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3.1 시위사건이나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주검이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곳도 이곳이었다.   소설가 현기영은 관덕정 광장에서 바라보았던 시국연설회, 군인과 토벌대, 그리고 목 잘린 머리통들의 기억을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붉은 동백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역사책에 고스란히 자리를 잡을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생생한 생활사는 그 시대를 산 자의 기록에 의해서만 복원이 가능하다. 아니 4.3이 ‘사태’에서 ‘항쟁’으로 신원이 되기까지는 폭압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고문을 견디며 끝끝내 펜을 놓지 않았던 문인들의 힘이 컸다.  풍문으로만 떠돌며 쉬쉬 거리던 4·3을 최초로 공론화했던 현기영의 순이 삼촌(1978)은 작가를 보안사로 끌고 가 모진 고문과 책의 발매 금지를 당하게 했다.   어느 대담에서 그는 “원래 내 생각은 세 편만 쓰고 그만두려고 했습니다.…그런데 당국에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더란 말입니다. 뭐, 조사도 당하고 끌려가기도 했죠.…그러니 나는 계속 쓸 수밖에 없었고 또 소설만 쓴 게 아니라, <4.3 연구회>라는 조직도 만들었죠.…정권과 일대일로 붙을 수도 있는 것이 문학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작 가세계』36, 1998.)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얼마나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가?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는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의 ‘너분숭이’라는 밭은 군경토벌대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320명의 영혼이 숨 쉬는 곳이 다. 한번 찾아볼 일이다.)  현기영, 오성찬, 현길언, 고시홍, 한림화, 김석범 등 4.3항쟁 시기를 살았던 소설가들의 뇌리에 각인된 피의 살육은 그들의 고통스런 글쓰기를 이끌며 참된 세상에 대한 갈망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현기영의 <순이삼촌 > <아버지>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잃어버린 시절> <아스팔트> <길>, 오성찬의 <연 날리기> <사포에서> <겨울산행>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크는 산>, 현길언의 <우리들의 조부님> <귀향> <먼 훗날> <지나는 바람에게> <귀향> <未明> <한라산>, 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 고시 홍의 <도마칼> <해야 솟아라> <계명의 도시> <저승문> <유령들의 친목회> <자서전 고쳐쓰기>, 재일 작가 김석범의 <火山島>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작품들이 ‘4.3문학’을 형성한다. ⑤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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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혁(시인, 문학박사)
    2019-07-22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 ➂
    ⓒ현송 강호(제주 효명사 주지)   제주 섬은 순수한 토착민들만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천지왕본풀이나 뒤에 보게 될 삼성혈신화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섬은 토착민들이 유입된 외지인들과 더불어 만들어간 공간이다. 제주에 들어온 시기를 보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조선 중기 당쟁 시기로 중심부에서 쫓겨 들어온 사람들이다. 당신 본풀이들이 말하는 신의 내력은 유입과 이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 놓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상의 창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설문대할망(선문데할망, 설명두할망, 세명뒤할망이라고도 전한다.)이라는 거대한 여신의 제주 섬 창조로 이어진다. 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발이 바다에 닿아 물장난을 할 정도로 거대했다. 할망은 밋밋했던 섬을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했다. 치마폭에 흙을 날라 한라산을 만들고, 구멍 난 치마폭의 흙으로 초원 위에 오름들을 만들었다. 성산 일출봉과 식산봉에 양 발을 디디고 앉아 시원스레 눈 오줌으로 소섬[牛島]을 만들었다. 그런데 섬에 갇혀 살던 사람들이 육지로 다리를 놓아 달라는 부탁에 할망은 속옷 한 벌을 요구했다. 거친 밥을 먹으며 살던 섬사람들은 100필의 명주에서 1필이 모자라는 바람에 속옷을 완성하지 못했고, 다리를 놓아가다 그만 둔 흔적이 조천 앞바다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제주 섬을 창조한 할망은 바다고기를 잘 잡는 할으방을 만나 윤 3월 16일 500형제 자식을 낳고 고기를 함께 잡으며 살았다. 그런데 식구가 많은데다 흉년이 들어 할망은 자식들에게 죽이라도 끓일 양식을 구해 오라고 타일러 보냈다. 죽을 끓이느라 어마어마하게 큰 가마솥에 불을 때다 할망은 발을 잘못 디디어 죽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오백 형제는 여느 때보다 맛있게 죽을 먹었고, 막내가 솥을 휘젓다 사람의 뼈를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 고기를 먹은 걸 안 이들은 통탄을 하다 모두 바위로 굳어버렸고, 한라산 영실(靈室)의 수많은 기암괴석이 바로 그것이라 한다. 가을 단풍을 만끽하려면 한라산 서측의 이곳 영실을 찾으면 좋다. 거기에서 오백장군(오백나한) 바위를 따라 흐르는 바람을 느껴보기 바란다.  이처럼 설문대할망 설화에는 섬사람들의 육지를 향한 지향과 좌절감, 그리고 척박한 땅과 바다를 상대로 싸우며 견뎌야 했던 지독한 가난이 슬프게 아로새겨져 있다. 고립된 섬에 살던 제주인들은 외지인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면 깊숙이 육지를 향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기팔은 “먼 바다 푸른 섬 하나/ 아름다운 것은/ 내가 건널 수 없는 수평선/ 끝끝내 닿지못할/ 그리움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먼 바다 푸른 섬 하나)라고 노래했다. 그래서 문충성은 “제주섬은 가난과 한숨에 흔들리고 날마다/ 흔들리는 제주섬 지키는 설문대할망은/ 제주섬 사람들 수천 년 살아온/ 전설이 되고 바람이 되고 영욕이 되고/ 이어도를 꿈꾸는 꿈이 되고 노래가 되고”(설문대할망)라며 섬사람들의 슬픔과 꿈이 스며든 존재로 설문대할망을 노래했던 것이다.  제주는 신화의 섬이다. 신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신들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본풀 이가 굿의 현장에 있다. 천지왕본풀이를 비롯한 천지와 일월, 산과 바다, 생사와 농경, 어로, 빈부 등을 지배하는 12편의 일반신본풀이, 마을의 수호신인 당신의 내력을 말하는 당신본풀 이, 일족(一族)의 수호신을 말하는 조상본풀이가 섬을 지키고 있다. 이 신들의 노래는 346개나 되는 신당에서 불려진다. 그 가운데 제주의 토착신인 수렵을 생업으로 하던 남신인 한라 산신을 모시는 와흘본향당이나 제주 신당의 원조로 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받은 송당본향당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신당들은 인적이 뜸한 곳에 돌담들을 쌓아 만든 정말 소박한 곳이다. 생각하니, 타다 남은 양초와 지전을 태운 냄새, 향내와 음식 냄새가 뒤섞인 신당 안에서 무서워 떨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거친 산, 바다와 싸우던 제주 민중의 소박한 기원이 신당에는 살아 있다. 새마을운동 시기 미신타파를 부르짖으며 민속문화재라 할 신당을 파괴 하던 때가 있었다. 그 와중에 현용준, 진성기 선생님 등이 가까스로 챙겨 놓은 신당과 무가들은 제주 신화의 특수성과 우수성을 전세계에 한껏 뽐내게 한다. 그리고 그곳을 채우던 심방들의 노랫가락이 아직 살아 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현용준 선생님은 『한라산 오르듯이』(각, 2003)이라는 자전수필을 통해 제주 신화의 보존 과정을 흥미롭게 알려주셨다. ➃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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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혁(시인, 문학박사)
    2019-07-07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➁
    ⓒ현송 강호(제주 효명사 주지)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제주에 전하는 창세신화인 천지왕본풀이는 무당들의 노랫가락에 실려 9편 정도가 전한다. 태초에 세상은 하늘과 땅이 서로 뒤섞여 처음과 끝도 없고 안과 밖도 없었으며, 삶과 죽음, 선과 악도 없는 혼돈의 상태였다. 하늘에서 푸른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검은 이슬이 솟아올랐다. 하늘은 자시(子時)에 열리고, 땅은 축시(丑時)에 열렸으며, 사람은 인시(寅時)에 태어났다. 이렇게 세상이 창조되었지만 천지개벽의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거인이 나타났다. 그의 앞이마에서는 두 개의 해가, 뒤 이마에서는 두 개의 달이 나타났다.   동물들이 말을 하고, 귀신과 사람의 구분이 없는 혼란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수명장자(쉬맹이)가 사나운 소, 말, 개를 앞세워 사람들이 거둔 소출을 독차지하며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였다. 이를 안 천지왕은 번개장군과 벼락장군, 화덕진군과 풍우도사, 일만 군사를 이끌고 가 머리에 쇠테를 씌워 수명장자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그는 종을 불러 도끼로 머리에 씌워진 쇠테를 깨라고 명령하였다. 그 모습을 본 천지왕은 쇠테를 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지상에 잠시 머물던 천지왕은 지상의 총명부인과 결혼하여 대별왕과 소별왕을 낳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대별왕과 소별왕은 점점 자라났는데, 친구들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라 따돌림을 받았다. 형제는 어머니에게 떼를 써 마침내 박 넝쿨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천지왕은 큰아들 대별왕에게 이승을, 작은아들 소별왕에게 저승을 다스리라 했다. 작은아들은 수수께끼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이승을 차지하자고 형에게 제안했다. 마음 착한 형은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여 내기를 했는데 두 번 다 형이 이기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소별왕은 꽃을 누가 더 잘 키우는지를 내기하고는 형이 잠든 사이에 잘 자라는 형의 꽃을 자신의 꽃과 바꿔버렸다. 소별왕이 이승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승에서는 제2의 혼돈이 계속되었고 그 혼돈을 처리할 능력이 소별왕에게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형의 도움을 얻어 해와 달을 하나씩 활로 쏘아 없앴다. 초목과 짐승은 소나무 껍질 가루로 눌러 말을 못하게 했다. 귀신과 생사람은 저울로 무게를 달아 보아 백 근을 넘으면 인간으로 못 넘으면 귀신으로 처리했다. 자연의 질서가 바로 잡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승으로 형이 떠나자 또다시 살인, 도둑, 간음 등 무질서가 여전했다.  신화학적으로 보면 천지왕은 불과 쇠를 다루는 외래적 존재로 제주 섬에 있던 수신계(水神系)의 수명 장자를 벌하였고, 그의 후계인 두 아들로 하여금 섬을 지배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읽힌다. 두 개의 해는 극심한 더위와 가뭄을, 두 개의 달은 극심한 추위나 홍수를 의미한다. 그것의 조정은 곧 농작물의 풍작을 뜻한다. ➂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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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9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➀
    ⓒ현송 강호(제주 효명사 주지)   스물 무렵에 고향을 떠나온 나는 정작 서울 하늘 아래서 제주의 역사와 문학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삼별초의 일원이었던 김통정과 무당의 노래인 이공본풀이를 살피면서 유년의 이야기 속에 잠자던 제주가 선명하게 떠오르곤 했다. 가끔 쓰는 잡글도 여지없이 고향의 품안이었다. 어느새 제주는 내 의식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한복판에 들어선 한라산, 수백의 오름들과 초원, 1천여 종의 식물들과 짐승들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마냥 행복한 추억만 있지는 않다. 관광지의 어두운 그림자가 섬 토박이의 옹이 박힌 삶을 수렁으로 끌고 가는 악몽을 꾸게 된다. 점점 도시는 넓어져가고, 해안에 살던 사람들은 말과 소, 고라니의 터전인 초원과 한라산을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었다. 제주가 지닌 이러한 명암을 떠올리며 나는 아름다운 풍경 너머에 도사린 토박이들의 노래와 이야기를 찾아 떠났다.  요즘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찾지만 예전에는 뱃길뿐이었다. 풍랑이 일면 항상 열흘이나 한 달을 잡아야 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갈 때에도 풍랑과 천둥, 번개가 쳐서 죽살이를 예측할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그는 꼿꼿이 뱃머리에 앉아 시를 지어 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阮堂金公小傳) 이제 뱃길은 카훼리호를 타고 완도에서 세 시간, 목포에서 다섯 시간, 인천에서 열 댓 시간이 걸린다. 섬이 가까워졌음은 맨 먼저 나타나는 한라산 봉우리를 통해 알 수 있다.  일찍이 정지용은 김영랑과 함께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서며 한라산을 보고는 어찌나 반가웠던지 초야에 쳐다보지도 못하던 신부를 솟는 해 아래서 와락 사랑하게 됨과 같이 그리던 산을 모셨다고 했다.(一片 樂土) 고려시대 삼별초의 입도를 막기 위해 김수와 고여림이 진을 쳤던 화북 포구, 조선시대 제주도에 부임한 지방관들이 정치적 복권을 꿈꾸며 바다만 바라보던 연북정(戀北亭)이 서 있는 조천 포구 등이 제주의 관문이었으나 지금은 제주항이 나그네들을 반긴다.   제주항에 내리면 협죽도와 종려나무가 남국의 정취를 자아내고, 아주 가까이 한라산이 다가와 있다. 해안도 로를 타고 다니거나, 서부산업도로 오일륙도로를 통해 중문이나 서귀포를 향할 때에도 한라산은 늘 가까이 버티고 서 있어 제주도 전체가 한라산 자락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젖무덤 같은 오름들이 초원을 수놓고, 보석처럼 빛나는 바닷물이 섬을 휘감싸고 있다.   해안에는 일출봉과 산방산이 우뚝 솟았고, 천지연폭포, 정방폭포, 천제연폭포가 은하수 가득한 밤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멱을 감을 듯 고운 자태로 바다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이 신비로운 자연을 누가 창조했단 말인가? 섬사람들은 천지왕본풀이와 설문대할망설화를 통해 창조의 신화를 노래해왔다. 우리는 이 신화를 통해 섬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➁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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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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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 ⑥(최종회)
     ⑤편에서 이어집니다. 김녕에서 가까운 세화리와 하도리를 지났다. 이곳은 1930년대 잠녀(潛女)들의 투쟁을 그린 『껍질과 속살』, 『바람타는 섬』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해녀조합 간부들인 일본인들이 가혹하게 잠녀들을 수탈 했고, 이에 대한 저항을 다룬 소설들이다.  해녀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잠녀는 제주도 바닷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나는 세화리와 하도리를 뒤로 하고 차를 몰아 성산 일출봉 터진목에서 그들을 만났다. 까만 잠수복을 한 그들은 사진을 찍는 나를 웃으며 쳐다보았다. 예전에는 박으로 정성들여 만든 테왁을 썼는데 지금은 스티로폼으로 만든 것을 쓰고 있다. 조금 거리를 두고 해녀들이 물에 들었다.  1936년 21세 때부터 제주도를 연구한 문화인류학자 이즈미 세이이치(泉端一)의 『제주도』에는 “바가 지에 끈이 달린 테왁과 조개 딸 때 쓰는 갈퀴를 들고 물안경 쓰고 자맥질을 한다.…… 똑바로 선 자세로 물속에 얼굴을 박고, 목표물을 가늠한 다음 발을 힘 있게 굽혀 가슴께로 끌어당기고 머리를 잽싸게 물속에 디밀어, 몸을 뻗고 발을 공중에 흔들어 침하속도를 높인 다음, 신체가 완전히 물속에 잠기면 발을 차듯이 움직이고, 손으로 물을 양옆으로 가르면서 가라앉는다. 한 번의 잠수를 끝낼 때는, 몸을 꺾은 자세로 다리를 아래로 내려서 힘차게 바닥을 차고 솟구친다. 수면에 뜨는 것과 동시에 ‘휘유’ 휘파 람을 부는 것이다.”라고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그 휘파람을 제주에서는 ‘숨비소리(숨비 질소리)’라고 한다. 이 소리를 내고는 물질하는 친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해녀들은 1900년대 초부터 섬 밖으로 벌이를 나갔다고 한다. 일본, 육지 연안, 강원도, 심지어는 청진 까지 갔다가 기선을 타고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국 청도(靑島)까지도 갔다고 한다.   현기영의 거룩한 생애를 학창시절에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소설은 해녀 ‘간난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참으로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그녀는 일제시대 때 잠녀의 딸로 태어나 17살에 상꾼 잠녀가 되어 빼앗긴 밭을 되찾는다. 놀음에 미친 시아버지 때문에 무너진 집안을 그녀는 잠녀 일을 하여 일으 키고, 어린 신랑을 읍내 공립학교까지 보낸다. 그리고 일제 말엽에는 징용에 끌려가게 된 남편을 이끌고 육지로 물질 나가 금강산 근처에서 8.15 광복을 맞는다. 마침내 미군과 소련군이 지키는 38선을 넘어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4.3항쟁 시기에 한 많은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눈시울이 붉어 졌다. 강인한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너무도 서러웠기 때문이다.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 뒤로는 일출봉이 장엄하게 서 있었고, 파도는 거칠었다. 이곳은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와 신경숙의 소설 깊은 숨을 쉴 때마다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현송 강호(제주 효명사 주지)  표선민속촌과 성읍 민속마을에 들러 제주 도세기(돼지)도 보고, 올레며 정낭도 보며 옛 기억을 더듬었 다. 내 유년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갈옷을 파는 가게 앞에서도 한참을 서성거렸다. 푸른 감으로 물을 들이는 갈옷은 여름철 뙤약볕에서 김을 맬 때면 이만한 옷이 없었다. 땀도잘 흡수하고 바람도 잘 통하기 때문이다. 차를 달려 서귀포에서 이중섭이 거닐던 천지연폭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바로 추사 적거지로 향했다.  추사는 대정 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는 처음 화북진에 도착한 후 걸음을 옮겨 대정현의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섬 안의 섬이라 할 추사의 적거지는 가로 놓인 정낭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9년 간의 유배 생활은 추사로 하여금 한치의 틈도 없는 고독과 자연에의 몰입, 예술혼을 불태우게 했다. 그는 이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사랑하는 아내의 부고를 들었다. 그리고 수선화를 사랑했다고 한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 시름 가시고/ 너와의 선연(仙緣)은 다할 수 없어/ 호미 끝에 버려진 예사론 너를/ 오롯한 창가에 놓고 기른다.” 나는 어디 수선화를 심어놓지나 않았는지 주변을 서성거렸다.   제주는 신화의 섬이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섬이다.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 너머에 숨쉬고 있는 제주의 문화와 역사를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대별왕과 소별왕, 설문대할망을 이야기하고, 삼별초의 항쟁과 4.3항쟁, 해녀들과 유배자들의 쓰린 상처를 보듬어 안아줄 수있기를 소망한다.   * 참고문헌  고시홍,「제주섬의 소설적 변용」, 『바다와 섬의 문학과 인간』, 제주국제협의회 편, 1999.김영돈, 『제주민의 삶과 문화』, 제주문화, 1993.김헌선, 『한국의 창세신화』, 길벗, 1994.박종성, 「<천지왕본풀이>의 신화적 의미」, 『구비문학연구』6집, 한국구비문학회, 1998.시바 료타로, 『탐라 기행』, 학고재, 1998.오대혁, 「김통정 관련 서사물에 투영된 역사인식」, 『설화와 역사』, 집문당, 2000.이영권, 『제주역사기행』, 한겨레신문사, 2004.장주근, 『풀어쓴 한국의 신화』, 집문당, 1998.진성기, 『남국의 민담』, 형설출판사, 1976.진성기, 『제주도 무가 본풀이 사전』, 민속원, 1991.현용준, 『제주도 전설』, 서문문고, 1976.현용준 현승환 역주, 『제주도 무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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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1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 ⑤
    용두암 ⓒ비짓제주   나는 서둘러 용두암과 용연을 둘러보았다. 저녁 무렵에는 반짝이는 놀이시설과 호텔 그리고 높다랗게 쌓아올린 탑동매립지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어둠에도 잠들지 못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밤이 되어도/잠들지 못하는 제주바다야,/ 숱한 배반으로/ 쫓기고 떠밀려 온 세월을/ 이 밤도 울부짖는 바다야”(양중해 - 잠들지 못하는 바다)  제주의 어른들은 무슨 일이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뺄라진추륵 허지 말라(잘난 척 하지 마라).” “곤 밥(흰 밥) 먹은 소리 허지 말라.”라는 말을 흔히 했다. 왜 그랬을까? 제주 민중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소리 한번 쳐서 죽고, 나서서 죽고, 혼자 뛰어가다 죽고, 사람들에게 싸우자 하다 죽는 이들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제주민들의 외지인들에 대한 경계의 눈길도 어쩌면 죽음의 역사를 통해 내면화된 집단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아침 일찍 애월읍 항파두리를 찾았다. 삼별초가 여.몽연합군과 맞서 싸우던 곳이다. 강화도, 진도를 거쳐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온 김통정은 귀일촌에 토성과 석축으로 내외성을 쌓고, 애월포에 목성을, 하귀포에 군항(軍港)을 세웠다. 성의 규모는 외성인 토성의 둘레가 6Km 가량 되었고, 성 안에 백성들을 살게 했다. 여.몽연합군의 맹렬한 화공(火工)을 맞아 항전하다 함덕포가 무너지고, 항파두리성이 함락되자 김통정은 남은 병력만을 이끌고 한라산에서 싸우다 자결하고 만다.  김통정의 죽음은 고려에서 항몽세력의 뿌리가 완전히 뽑힌 것을 뜻한다. 고려 정부의 수탈과 지방관의 가렴주구에 시달려왔던 제주 민중은 김통정 세력에 협조하면서 반정부, 반외세의 기치를 함께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패배한 영웅으로 만들었고, 몽고의 마목장이 들어서며 제주 민중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김통정은 애월면 고내리의 고내본향당본풀이를 비롯한 6편의 무가 속에서 탐라의 생산물에 욕심을 부리다 세 장수에게 죽은 것으로 그려졌다. 항파두리 토성 일대에는 살맞은돌, 돌쩌귀, 장수물 등의 전설로 당시의 역사가 남아 있다.  다시 차를 돌려 북제주군 구좌읍 쪽으로 향했다. 김녕사굴과 만장굴을 찾았다. 제주에는 이외에도 협재굴, 쌍용굴, 소천굴, 황금굴, 빌레못굴 등 세계적인 용암동굴이 많이 있다. 만장굴은 13Km나 되고 석주, 종유석 등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고고학상 가치가 높은 굴이다. 만장굴 ⓒ비짓제주   김녕사굴은 S자형의 동굴로 세 개 부분으로 나뉘는데 뱀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에 이 굴 속에 살던 커다란 뱀은 매년 큰굿을 하고 처녀를 희생으로 바치지 않으면 곡식밭을 휘저어 흉년이 들게 했다.   이 즈음 서연(徐憐)이라는 판관(判官)이 부임하여 군졸과 함께 그 뱀을 창검으로 찔러 죽였다. 서판관은 배를 타고 제주를 떠나다 뱀신의 복수로 파선당하여 고기밥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뱀이 나왔겠는가? 조선시대 관리들이 유교 이념을 앞세워 제주의 신당을 파괴하려는 데 대한 민중의 저항 의식이 설화화된 것이리라.  이곳 김녕굴당에는 뱀신인 궤네깃또 신이 모셔진다. 바다를 건너 들어온 백주또 할망이 사냥을 하며 살아가던 토착신인 소천국과 만나 일곱 자식을 낳아 길렀다. 사냥을 해서는 먹고 살 길이 없어 농사를 짓는데, 소천국은 밭 갈던 소까지 잡아먹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 여덟째 자식을 낳아 기르던 백주또는 오백 장군의 딸을 첩으로 두고 살던 소천국을 찾아갔다.   그런데 소천국은 고기를 굽고 있었고, 그 모습에 화가 난 백주또는 아들 궤네깃또를 무쇠상자에 넣고 동해 바다로 띄워버린다. 궤네깃또는 용왕국의 막내딸과 결혼하고, 강남천자국에서 공을 세운 후 제주섬으로 들어온다. 그 모습에 무서워 도망가던 백주또와 소천국은 죽게 되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당신이 된다. 형들도 모두 죽는다. 궤네깃또는 궤네기에 좌정해 사람들이 일년에 한 번씩 통째로 돼지를 바치면 마을을 튼튼히 지켜주는 신이 되었다. 뱀신에게 돼지를 바치는 본풀이의 내용이 앞서 본 설화를 낳게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뱀신을 모시는 곳으로는 송당본향당, 대정광정당, 내도본향당, 표선 토산당, 차귀당 등이 있다. 그리고 일반신 본풀이인 칠성본풀이는 집안의 풍요를 가져오는 뱀신인 칠성을 노래한다. 지금은 많이 흐려졌지만 이렇듯 뱀 신앙은 제주도민의 생활 속에 깊숙이 살아 있었다. 제주도처럼 뱀 자체를 신앙화하면서 체계화한 곳은 찾기 힘들다고 한다. 현길언의 「김녕사굴 본풀이」는 김녕사굴에 얽힌 위 설화와 칠성 본풀이를 혼합하여 흥미롭게 쓴 소설이다. ⑥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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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혁(시인, 문학박사)
    2019-07-27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 ➃
    삼성혈은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세 시조가 태어난 곳이다. ⓒ비짓제주   제주시에서는 삼성혈을 맨 먼저 찾았다. 탐라국은 신라와 백제에 입조하여 국호와 벼슬을 받고 고려 태조 21년(938)에 고려에 속하게 되었는데 삼성혈은 그러한 역사 시대에 편입해 들어간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세 시조가 태어난 곳이다.   거목들이 들어찬 뜰을 걸어 들어가면 3개의 구덩이가 나온다. 이 구덩이에서 사람이 솟아나왔다는 것은 물론 허구이다. 아마도 탐라 건국신화이자 3성 시조의 신화를 노래하던 당굿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종 21년(1526)에 이수동 목사가 석단을 쌓고 혈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 유교식 조상 제의로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매년 유교식으로 대제(大祭)가 봉헌 된다. 『성주고씨전』(1416)과 『고려사』(1454)에는 삼성혈신화가 전해진다.  한라산 북쪽 기슭의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인은 탄생했다. 그들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 떠내려 왔다. 그 함을 열었더니 돌함과 붉은 띠를 두르고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가 있었다. 돌함에는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씨가 있었다. 사자는 벽랑국(碧浪國)에서 신의 아들 3인에게 배필이 필요할 듯하여 세 공주를 모시고 왔노라 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활로 거처할 땅을 점쳤다.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소와 말을 길러 살림이 풍부해졌다.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는 세 공주를 맞이한 연혼포(延婚浦. 속칭 황루알)와 결혼식을 올린 혼인지(婚姻池)가 있다.  삼성혈 가까이에 있는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중앙로로 걸어 내려갔다. 세종 30년(1448)에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세워진 관덕정을 찾아가니 제주목 관아가 그 옆에 복원되고 있었다. 탐라국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정치와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곳을 1991년부터 발굴하여 옛 모습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덕정 광장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하니 관아 복원만으로 채울 수 없는 곳임을 생각하게 했다.   사진출처_비짓제주   관덕정 광장은 천주교도들의 횡포와 봉세관의 조세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이재수의 난’의 무대였 다. 수백 명의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는 구한말에 일어난 방성칠 난과 함께 이재수의 난을 그렸다. 관권의 핍박과 외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대한 제주민의 항쟁을 다루었다.  또한 관덕정 광장은 일제 말엽에는 5일장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 4.3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3.1 시위사건이나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주검이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곳도 이곳이었다.   소설가 현기영은 관덕정 광장에서 바라보았던 시국연설회, 군인과 토벌대, 그리고 목 잘린 머리통들의 기억을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붉은 동백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역사의 소용돌이는 역사책에 고스란히 자리를 잡을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생생한 생활사는 그 시대를 산 자의 기록에 의해서만 복원이 가능하다. 아니 4.3이 ‘사태’에서 ‘항쟁’으로 신원이 되기까지는 폭압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고문을 견디며 끝끝내 펜을 놓지 않았던 문인들의 힘이 컸다.  풍문으로만 떠돌며 쉬쉬 거리던 4·3을 최초로 공론화했던 현기영의 순이 삼촌(1978)은 작가를 보안사로 끌고 가 모진 고문과 책의 발매 금지를 당하게 했다.   어느 대담에서 그는 “원래 내 생각은 세 편만 쓰고 그만두려고 했습니다.…그런데 당국에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더란 말입니다. 뭐, 조사도 당하고 끌려가기도 했죠.…그러니 나는 계속 쓸 수밖에 없었고 또 소설만 쓴 게 아니라, <4.3 연구회>라는 조직도 만들었죠.…정권과 일대일로 붙을 수도 있는 것이 문학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작 가세계』36, 1998.)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얼마나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가?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는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의 ‘너분숭이’라는 밭은 군경토벌대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320명의 영혼이 숨 쉬는 곳이 다. 한번 찾아볼 일이다.)  현기영, 오성찬, 현길언, 고시홍, 한림화, 김석범 등 4.3항쟁 시기를 살았던 소설가들의 뇌리에 각인된 피의 살육은 그들의 고통스런 글쓰기를 이끌며 참된 세상에 대한 갈망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현기영의 <순이삼촌 > <아버지>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잃어버린 시절> <아스팔트> <길>, 오성찬의 <연 날리기> <사포에서> <겨울산행>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크는 산>, 현길언의 <우리들의 조부님> <귀향> <먼 훗날> <지나는 바람에게> <귀향> <未明> <한라산>, 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 고시 홍의 <도마칼> <해야 솟아라> <계명의 도시> <저승문> <유령들의 친목회> <자서전 고쳐쓰기>, 재일 작가 김석범의 <火山島>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작품들이 ‘4.3문학’을 형성한다. ⑤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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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혁(시인, 문학박사)
    2019-07-22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 ➂
    ⓒ현송 강호(제주 효명사 주지)   제주 섬은 순수한 토착민들만이 살았던 공간이 아니다. 천지왕본풀이나 뒤에 보게 될 삼성혈신화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섬은 토착민들이 유입된 외지인들과 더불어 만들어간 공간이다. 제주에 들어온 시기를 보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조선 중기 당쟁 시기로 중심부에서 쫓겨 들어온 사람들이다. 당신 본풀이들이 말하는 신의 내력은 유입과 이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 놓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상의 창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설문대할망(선문데할망, 설명두할망, 세명뒤할망이라고도 전한다.)이라는 거대한 여신의 제주 섬 창조로 이어진다. 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발이 바다에 닿아 물장난을 할 정도로 거대했다. 할망은 밋밋했던 섬을 아름답게 꾸미기 시작했다. 치마폭에 흙을 날라 한라산을 만들고, 구멍 난 치마폭의 흙으로 초원 위에 오름들을 만들었다. 성산 일출봉과 식산봉에 양 발을 디디고 앉아 시원스레 눈 오줌으로 소섬[牛島]을 만들었다. 그런데 섬에 갇혀 살던 사람들이 육지로 다리를 놓아 달라는 부탁에 할망은 속옷 한 벌을 요구했다. 거친 밥을 먹으며 살던 섬사람들은 100필의 명주에서 1필이 모자라는 바람에 속옷을 완성하지 못했고, 다리를 놓아가다 그만 둔 흔적이 조천 앞바다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제주 섬을 창조한 할망은 바다고기를 잘 잡는 할으방을 만나 윤 3월 16일 500형제 자식을 낳고 고기를 함께 잡으며 살았다. 그런데 식구가 많은데다 흉년이 들어 할망은 자식들에게 죽이라도 끓일 양식을 구해 오라고 타일러 보냈다. 죽을 끓이느라 어마어마하게 큰 가마솥에 불을 때다 할망은 발을 잘못 디디어 죽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오백 형제는 여느 때보다 맛있게 죽을 먹었고, 막내가 솥을 휘젓다 사람의 뼈를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 고기를 먹은 걸 안 이들은 통탄을 하다 모두 바위로 굳어버렸고, 한라산 영실(靈室)의 수많은 기암괴석이 바로 그것이라 한다. 가을 단풍을 만끽하려면 한라산 서측의 이곳 영실을 찾으면 좋다. 거기에서 오백장군(오백나한) 바위를 따라 흐르는 바람을 느껴보기 바란다.  이처럼 설문대할망 설화에는 섬사람들의 육지를 향한 지향과 좌절감, 그리고 척박한 땅과 바다를 상대로 싸우며 견뎌야 했던 지독한 가난이 슬프게 아로새겨져 있다. 고립된 섬에 살던 제주인들은 외지인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면 깊숙이 육지를 향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기팔은 “먼 바다 푸른 섬 하나/ 아름다운 것은/ 내가 건널 수 없는 수평선/ 끝끝내 닿지못할/ 그리움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먼 바다 푸른 섬 하나)라고 노래했다. 그래서 문충성은 “제주섬은 가난과 한숨에 흔들리고 날마다/ 흔들리는 제주섬 지키는 설문대할망은/ 제주섬 사람들 수천 년 살아온/ 전설이 되고 바람이 되고 영욕이 되고/ 이어도를 꿈꾸는 꿈이 되고 노래가 되고”(설문대할망)라며 섬사람들의 슬픔과 꿈이 스며든 존재로 설문대할망을 노래했던 것이다.  제주는 신화의 섬이다. 신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신들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본풀 이가 굿의 현장에 있다. 천지왕본풀이를 비롯한 천지와 일월, 산과 바다, 생사와 농경, 어로, 빈부 등을 지배하는 12편의 일반신본풀이, 마을의 수호신인 당신의 내력을 말하는 당신본풀 이, 일족(一族)의 수호신을 말하는 조상본풀이가 섬을 지키고 있다. 이 신들의 노래는 346개나 되는 신당에서 불려진다. 그 가운데 제주의 토착신인 수렵을 생업으로 하던 남신인 한라 산신을 모시는 와흘본향당이나 제주 신당의 원조로 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받은 송당본향당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신당들은 인적이 뜸한 곳에 돌담들을 쌓아 만든 정말 소박한 곳이다. 생각하니, 타다 남은 양초와 지전을 태운 냄새, 향내와 음식 냄새가 뒤섞인 신당 안에서 무서워 떨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거친 산, 바다와 싸우던 제주 민중의 소박한 기원이 신당에는 살아 있다. 새마을운동 시기 미신타파를 부르짖으며 민속문화재라 할 신당을 파괴 하던 때가 있었다. 그 와중에 현용준, 진성기 선생님 등이 가까스로 챙겨 놓은 신당과 무가들은 제주 신화의 특수성과 우수성을 전세계에 한껏 뽐내게 한다. 그리고 그곳을 채우던 심방들의 노랫가락이 아직 살아 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현용준 선생님은 『한라산 오르듯이』(각, 2003)이라는 자전수필을 통해 제주 신화의 보존 과정을 흥미롭게 알려주셨다. ➃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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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혁(시인, 문학박사)
    2019-07-07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➁
    ⓒ현송 강호(제주 효명사 주지)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제주에 전하는 창세신화인 천지왕본풀이는 무당들의 노랫가락에 실려 9편 정도가 전한다. 태초에 세상은 하늘과 땅이 서로 뒤섞여 처음과 끝도 없고 안과 밖도 없었으며, 삶과 죽음, 선과 악도 없는 혼돈의 상태였다. 하늘에서 푸른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검은 이슬이 솟아올랐다. 하늘은 자시(子時)에 열리고, 땅은 축시(丑時)에 열렸으며, 사람은 인시(寅時)에 태어났다. 이렇게 세상이 창조되었지만 천지개벽의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거인이 나타났다. 그의 앞이마에서는 두 개의 해가, 뒤 이마에서는 두 개의 달이 나타났다.   동물들이 말을 하고, 귀신과 사람의 구분이 없는 혼란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수명장자(쉬맹이)가 사나운 소, 말, 개를 앞세워 사람들이 거둔 소출을 독차지하며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였다. 이를 안 천지왕은 번개장군과 벼락장군, 화덕진군과 풍우도사, 일만 군사를 이끌고 가 머리에 쇠테를 씌워 수명장자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그는 종을 불러 도끼로 머리에 씌워진 쇠테를 깨라고 명령하였다. 그 모습을 본 천지왕은 쇠테를 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지상에 잠시 머물던 천지왕은 지상의 총명부인과 결혼하여 대별왕과 소별왕을 낳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대별왕과 소별왕은 점점 자라났는데, 친구들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라 따돌림을 받았다. 형제는 어머니에게 떼를 써 마침내 박 넝쿨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천지왕은 큰아들 대별왕에게 이승을, 작은아들 소별왕에게 저승을 다스리라 했다. 작은아들은 수수께끼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이승을 차지하자고 형에게 제안했다. 마음 착한 형은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여 내기를 했는데 두 번 다 형이 이기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소별왕은 꽃을 누가 더 잘 키우는지를 내기하고는 형이 잠든 사이에 잘 자라는 형의 꽃을 자신의 꽃과 바꿔버렸다. 소별왕이 이승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승에서는 제2의 혼돈이 계속되었고 그 혼돈을 처리할 능력이 소별왕에게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형의 도움을 얻어 해와 달을 하나씩 활로 쏘아 없앴다. 초목과 짐승은 소나무 껍질 가루로 눌러 말을 못하게 했다. 귀신과 생사람은 저울로 무게를 달아 보아 백 근을 넘으면 인간으로 못 넘으면 귀신으로 처리했다. 자연의 질서가 바로 잡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승으로 형이 떠나자 또다시 살인, 도둑, 간음 등 무질서가 여전했다.  신화학적으로 보면 천지왕은 불과 쇠를 다루는 외래적 존재로 제주 섬에 있던 수신계(水神系)의 수명 장자를 벌하였고, 그의 후계인 두 아들로 하여금 섬을 지배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읽힌다. 두 개의 해는 극심한 더위와 가뭄을, 두 개의 달은 극심한 추위나 홍수를 의미한다. 그것의 조정은 곧 농작물의 풍작을 뜻한다. ➂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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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대혁(시인, 문학박사)
    2019-06-29
  • [제주신화여행]남국의 신화와 옹이 박힌 토박이들의 삶➀
    ⓒ현송 강호(제주 효명사 주지)   스물 무렵에 고향을 떠나온 나는 정작 서울 하늘 아래서 제주의 역사와 문학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삼별초의 일원이었던 김통정과 무당의 노래인 이공본풀이를 살피면서 유년의 이야기 속에 잠자던 제주가 선명하게 떠오르곤 했다. 가끔 쓰는 잡글도 여지없이 고향의 품안이었다. 어느새 제주는 내 의식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한복판에 들어선 한라산, 수백의 오름들과 초원, 1천여 종의 식물들과 짐승들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마냥 행복한 추억만 있지는 않다. 관광지의 어두운 그림자가 섬 토박이의 옹이 박힌 삶을 수렁으로 끌고 가는 악몽을 꾸게 된다. 점점 도시는 넓어져가고, 해안에 살던 사람들은 말과 소, 고라니의 터전인 초원과 한라산을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었다. 제주가 지닌 이러한 명암을 떠올리며 나는 아름다운 풍경 너머에 도사린 토박이들의 노래와 이야기를 찾아 떠났다.  요즘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찾지만 예전에는 뱃길뿐이었다. 풍랑이 일면 항상 열흘이나 한 달을 잡아야 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갈 때에도 풍랑과 천둥, 번개가 쳐서 죽살이를 예측할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그는 꼿꼿이 뱃머리에 앉아 시를 지어 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阮堂金公小傳) 이제 뱃길은 카훼리호를 타고 완도에서 세 시간, 목포에서 다섯 시간, 인천에서 열 댓 시간이 걸린다. 섬이 가까워졌음은 맨 먼저 나타나는 한라산 봉우리를 통해 알 수 있다.  일찍이 정지용은 김영랑과 함께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서며 한라산을 보고는 어찌나 반가웠던지 초야에 쳐다보지도 못하던 신부를 솟는 해 아래서 와락 사랑하게 됨과 같이 그리던 산을 모셨다고 했다.(一片 樂土) 고려시대 삼별초의 입도를 막기 위해 김수와 고여림이 진을 쳤던 화북 포구, 조선시대 제주도에 부임한 지방관들이 정치적 복권을 꿈꾸며 바다만 바라보던 연북정(戀北亭)이 서 있는 조천 포구 등이 제주의 관문이었으나 지금은 제주항이 나그네들을 반긴다.   제주항에 내리면 협죽도와 종려나무가 남국의 정취를 자아내고, 아주 가까이 한라산이 다가와 있다. 해안도 로를 타고 다니거나, 서부산업도로 오일륙도로를 통해 중문이나 서귀포를 향할 때에도 한라산은 늘 가까이 버티고 서 있어 제주도 전체가 한라산 자락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젖무덤 같은 오름들이 초원을 수놓고, 보석처럼 빛나는 바닷물이 섬을 휘감싸고 있다.   해안에는 일출봉과 산방산이 우뚝 솟았고, 천지연폭포, 정방폭포, 천제연폭포가 은하수 가득한 밤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멱을 감을 듯 고운 자태로 바다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이 신비로운 자연을 누가 창조했단 말인가? 섬사람들은 천지왕본풀이와 설문대할망설화를 통해 창조의 신화를 노래해왔다. 우리는 이 신화를 통해 섬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➁편으로 이어집니다.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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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1
  • [칼럼] 큰 눈으로 시대를 바라보라
      오대혁, 시인·문화평론가   볼을 받치고 커다란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시인 김수영을 본다. 흑백사진 속에서 그는 “작은 눈으로 큰 현실을 다루거나 작은 눈으로 현실을 다루지 말고 큰 눈으로 작은 현실을 다루게 되어야 할 것이다. 큰 눈은 지성이고 그런 큰 지성만이 현대시에서 독자를 리드할 수 있다.”(『전집』2, 385~386.)라고 말한다. 서거 50주년 기념으로 2018년 12월에 나온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 1982년이 초판)은 현대사의 격랑(激浪)과 그 파고의 정점에서 발휘되어야 할 ‘큰 눈’을 생각하게 한다.   평전은 일제로부터 해방정국, 6·25, 4·19, 5·16 등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밀고나갔던 김수영의 거칠고 끈질긴 삶의 자취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거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마침내 반공포로로 풀려나는 대목, 4·19혁명의 현장에서 ‘일어서는 풀들’을 목도하며 광장을 내달리는 장면, 군사독재의 틈바구니에서도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부르짖으며 현실을 향해 소리치는 시인의 모습 등을 작가 최하림은 치밀하게 그려냈다. ‘머리’로도 ‘심장’으로도 아닌 ‘온몸’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시를 창조해야 함을 보여준 김수영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발견.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번역 일을 하고 가족과 어머니를 위해 닭장 주변을 서성이는 생활인을 보았다. “보석 같은 아내와 아들은 / 화롯불을 피워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 짓이긴 파 냄새가 술 취한 / 내 이마에 신약(神藥)처럼 생긋하다”(「초봄의 뜰 안에」에서). 소소한 일상의 소묘가 얼마나 지난한 파고를 뚫고 형성된 것인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격랑의 시대 속에서도 서울의 술집과 찻집을 종횡무진하며 벗들과 허물없이 사귀는 모습이 내 마음에 똬리를 틀었다. 희미한 조명등 아래 자리한 시인, 화가, 음악가, 소설가 들이 내뿜는 열기는 비루한 일상에 사로잡혀 사는 나를 깨운다.   4·19가 열광과 환희에서 배반당했을 때 그는 “하여간 세상은 바꿔졌다. 무엇이 바꿔졌느냐 하면 나라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정부에 있지 않고 민중에 있다는 자각이 강해져 가고 있고…”(338)라고 쓴다. 이 대목은 촛불혁명 이후 역사를 왜곡하며, 화합과 통일을 거부하는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 상황과 오버랩 되게 한다.   그들은 불안하다. 라캉의 표현을 빌자면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자크 라캉의 《세미나》 읽기』, p.322.) 불안하다. 분단 체제를 뒤집고 화합, 통일로 가는 노정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준비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구조 안에서 사고한다. 반공이데올로기로 전세 역전을 탐하지만 시대착오적이다. 모든 치유는 기존의 구조 밖으로 뛰쳐나가야만 가능하다. 일본과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개입에 따라 ‘떡고물’을 받아먹던 세력들은 ‘온몸’으로 뚫고 일어서는 ‘민초’의 힘을 모른다. 물론 ‘민초’들도 정부에 대해 불안감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가 기존의 구조를 뚫고 나가야만 가능함을 민초들은 똑똑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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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15
  • [칼럼] 욕망의 ‘스카이 캐슬’에서 벗어나기
                                                                                    오대혁(시인, 문화평론가) 강준상은 혜나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고 골프 약속을 지킨다. 나중에야 사랑했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기 딸을 죽이고 말았음을 알고 오열한다. 어머니의 뜻대로 의대를 욕망하고, 병원장을 욕망하며 살아온 ‘꼭두각시 삶’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꼭 주남대 병원장이 아니어도 어머니의 아들 맞잖아요? 나 그냥 엄마 아들이면 안 돼요?”라고 울부짖는다. 아내 한서진(곽미향)을 향해서는 “당신도 욕심 내려놔. 예서 인생하고 당신 인생은 다른 거야.”라고 말한다.      「SKY 캐슬」은 허구적 욕망에 매달리는 지금의 우리를 까발린다. 삼 대째 의사 집안이 기를 욕망하는 사람들, 가족을 욕망하다 죽임을 당한 혜나, 잃어버린 권력욕을 딸과 아들에게 투사하는 차 교수, 정신질환자가 된 제2의 아인슈타인이었던 딸을 두고 ‘저승사자’가 된 김주영.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서 꿈틀대며 시청률을 20%까지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들의 욕망은 자발적 욕망이 아니다. 르네 지라르(René Girad)가 말하듯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있는 매개자(mediator)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종교인이 신의 욕망을 모방하듯, 마담 보바리가 로맨스 책을 보며 파리 여자들의 사치스럽고 낭만적인 여주인공의 사랑 얘기에 빠져 고유한 목소리와 판단력을 잃어버리듯, 형이상학적 욕망은 결코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      강렬하게 꿈꾸던 연인을 만나 결혼에 골인했으나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처럼, 인생의 목표가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을 찾아 달려간다. 신이나 영웅을 믿던 시대는 이상적 존재의 욕망을 모방하여 평화로웠을 수 있으나, 민주화 시대엔 우상을 대신해 수많은 라이벌을 갖고 서로가 서로의 신이 된다. 부러움, 질투, 증오, 무기력이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과 폭력에 감염된다.(『속임수, 욕망, 그리고 소설』, 1965.) 「SKY 캐슬」은 지금 우리의, 그와 같은 욕망의 얽힘과 폭력적 상황을 잘 그려냈던 것이다.    욕망은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그런 욕망을 충족하려면 온갖 열정을 쏟아야 한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 매개자 없는 진정한 욕망은 어떤 것인가? 최근에 나온 『독일 교양 이데올로기와 비전』(이광주, 도서출판 길.)은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훔볼트는 대학 제도를 바탕으로 학문을 통한 교양, 학문의 자유를 꿈꾸면서 전문직이 교양 시민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은 관료 집단을 이루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신분과 지위를 보장받으려 했다. 노발리스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중세, 민족이라는 매개자를 욕망하면서 반근대적 기치를 내걸었다. 그와 같은 지식인 집단들이 이어지면서 비정치적이며 반사회적인, ‘특이한 길’을 독일이 걸어왔다고 이광주는 말한다. 그러면서 “자유는, 개인적이면서 그만큼 진정으로 사회적인 자유는 현실과 맞선 슬기로운 정치적 사유와 실천에서 싹트고 발전한다.”(376쪽.)라고 한다.      자유는 진정한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사회 현실과 맞서지 않는, 속물적이며 매개된 욕망은 허구다. 진정한 자유, 욕망을 하려거든 사회 현실과 만나 슬기롭게 사유하고 실천해야 한다. 아뿔싸, 사적 욕망으로 법을 집행한 자가 사법농단으로 구속 수감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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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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